손성애 칼럼니스트
손성애 칼럼니스트

전 세계적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감염병 ‘코로나 19’는 공포이며 두려움이다.

십여년 전에 신종플루가 왔을 때, 몇 년 전 독감이 급속도로 퍼지고 있을 때 이 모든 것은 죽음의 공포였다. 그렇지만 이전의 감염병보다 더 심각한 ‘코로나 19’는 원인을 모르기 때문에 더 큰 공포가 생길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인간은 죽음의 공포가 제일 클 것이다. 죽음의 순간에서도 살아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룬 TV 프로들에서 사연을 듣다 보면, 그들이 생명을 보존할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것은 ‘정신력’이었다.

‘정신만 똑바로 차리면 사자 굴에 들어가도 산다’는 선조들의 말 속에서 정신력이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력을 알 수 있다.

죽음의 반대는 삶이다. 우리들은 흔히 무심코 말한다. ‘죽지 못해 산다’, ‘죽고 싶을 만큼 힘들다’, ‘죽을 만큼 고생한다’, ‘오래 살아 못 볼것 많이 보니 빨리 죽고 싶다’ 이러한 말들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일까? 생각해 볼 시점이 있었다.

요즘 코로나 19로 많은 사람들이 죽음의 공포 속에서 두려움, 염려, 불안을 떠안고 근심하며 살기에 더 안타까움이 큰 이때, 나는 생각했다. 우리 선조들의 위대함을.

‘코로나 19’는 두려움이 되고 건강에 공포가 되는 건 떨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렇지만 인간에게는 ‘생각’이라는 더 큰 힘이 있다.

그 힘을 부정으로 키워 몸도 맘도 아프게 하고 지치고 힘들게 하면 공포가 커지고 부정으로 몰아치는 죽음의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될 것이다.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생각’의 힘을 키울 때가 지금 바로 이 순간이라 생각하게 되었다.

나 또한 죽음을 생각해 본 적이 없지 않다. 아마도 이런 생각을 했다는 자체가 자신에게는 좋지 않은 기억이 될 수 있다. 그렇지만 난 그렇지 않다. 그 고통을 이겨냈고 건강한 생각으로 마음의 힘을 키울 수 있었다. 비바람에 더 견고해지는 들풀처럼, 눈 덮인 차갑고 단단한 땅에 자신을 소중하게 키우는 봄의 새싹처럼, 강풍에도 꺽이지 않고 자신을 움직여 생명력을 지키는 꽃들처럼... 이 모든게 자연의 섭리이며 인간이 생각하는 힘을 기를 수 있도록 격려하는 삶의 풍경들이다.

어린이집에서 친구들과 함께 책상에 앉아 있지만 사회적 거리두기로 외롭게 밥을 먹어야 하는 이상한 풍경. 마스크를 벗지 못하는 답답함. 누가 아이들에게 이 어려운 상황을 이해할 수 있게 설명할 수 있을까? 어른들도 겁나는 이 풍경들.

두 번 다시 이 풍경이 오지 않아야 한다. 미래의 밝고 맑음을 아이들에게 선물해주고 싶다. 그 선물은 우리 어른들이 감당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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