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세에 역사학 공부하는 노인

필자가 버클리 대학 편입 전에 다녔던 하버 칼리지
필자가 버클리 대학 편입 전에 다녔던 하버 칼리지

복도에서 강의실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옆에 나이 많아 보이는 노인 하나가 와서 않는다. 어느 학생의 할아버지인 것 같다. 들고 있는 학생 가방은 손자 혹은 손녀 것인 모양이다.

그는 전공이 뭐냐고 물으며 말을 걸어왔다. 내가 사회학과 정치학을 공부할 것이라고 대답을 하자 자기는 역사학이라고 말했다.

내가 미쳐 의아해 하는 질문을 던지기도 전에 그는 공부가 얼마나 재미있는지 모른다고 다소 들뜬 음성으로 말을 했다. 그는 계속해서 자기의 이야기를 했다.

은퇴한지 15년이 됐다, 지금 사 년 째 공부하고 있는 파트타임 학생(12학점 미만을 공부하는 학생)이다, 공부하는 게 무척 흥미로워서 끊임없이 계속할 것이라는 등의...

내가 공부하고 있는 사회과학대학 건물에는 공부하는 노인이 많지를 않다. 20대 초, 혹은 중반의 아이들이 대부분이다. 공부가 쉽지 않을 뿐더러 나이 들어 자기의 전문적인 일과의 연결된 학과가 별로 없기 때문이다.

우리 과에서도 내가 나이가 제일 많아 젊은 학생들과 함께 앉아있는 것이 다소 쑥스러운 느낌이 없지 않은 데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학생들 틈에 끼어 공부한다는 것이 쉽지가 않을 것 같다.

그러나 그의 표정으로 보아 조금도 쑥스러워 하는 기색이 없다. 그는 올해 73세라고 했다. 그런데도 힘든 기색 하나도 없이 공부를 하는 그를 보며, 나이 때문에 쑥스러워한 내 자신이 부끄러웠다.

자기가 하고 싶은 일, 혹은 자기가 해야할 일은 주변의 시선에 아랑 곳 하지 않는 것이 미국인들의 특징인 것 같다. 그는 점수가 형편없다고 한다. 그래도 자기의 손자뻘 되는 아이들하고 당당하게 공부를 한다. 점수, 혹은 나이에 상관없이 그저 하고 싶은 공부만을 한다는 의지만이 그의 눈에 번뜩이고 있었다.

이제 언제 세상 떠날지 모르는 나이에 역사를 배워서 뭘 하자는 걸까? 배워서 누군가를 가르치기 위해? 대학 졸업 간판을 위해서? 아니면 특별히 학문적인 연구가 필요해서?

모두가 아니다. 그런 이유에서라면 이제 학부과정이나 밟을 리는 없다. 생각 건데는 그저 배우는 자체가 좋아서라는 것 이외에는 아무 것도 없는 것 같다.

한심스럽게 생각되는 그의 만학(만학보다는 노학이라는 편이 더 어울릴 것 같다.)을 조금만 바꾸어서 생각해 보면 그것보다 바람직한 일도 없는 것 같다.

그에게는 공부자체가 더없이 의미 있고 흥미 있는 일이다. 쓰임 같은 것은 애써 생각하지 않는다. 아니 배운 것이 한번도 소용이 없이 세상을 떠날지도 모른다. 그러나 죽을 때까지 배우고 싶다는 그의 학문에 대한 열정은 그 어떤 것보다도 그의 삶을 강인하게 지켜주는 원동력이 될 것 같다.

비록 그의 지적 소유는 한번도 드러낼 일이 없을 지 몰라도 그것을 지켜보는 그의 자녀, 혹은 한 클래스에서 같이 공부하는 급우들에게는 더할 수 없는 교훈적인 존재다.

배움처럼 가치 있는 일도 없다는 그의 말대로 우리는 죽을 때까지 배우려는 노력을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그런 자세는 설령 자기에게서는 더 이상 소용이 없을 지경에 이르더라도 후대에 좋은 정신 유산으로 물려 줄 수 있는 귀한 것일 수가 얼마든지 있는 것이다.

곧 강의 시간이 되어 그와 헤어졌다. 떠나 올 때 손을 흔들며 최선을 다해 열심히 공부하라고 당부하던 그 노인의 모습은 평생을 못 잊을 것 같다. 그는 또 한사람에게 귀한 교훈을 남긴 것이다.

◆ 외부 필진 칼럼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

본 기사는 영어, 일본어, 중국어로 볼 수 있습니다.
번역을 원한다면 해당 국가 국기 이모티콘을 클릭하시기 바랍니다.

This news is available in English, Japanese, Chinese and Korean.
For translation please click on the national flag emoticon.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저작권자 © 라이센스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